# 1.

사시사철 물 안개가 뿌옇게 끼는 이멘 마하의 거리는 그날따라 유독 화창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오가는 인적이 드물었다. 대륙 전역을 덮은 운석 조각은 왕성뿐만 아니라 이멘 마하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며칠 전 광장과 성당으로 이어지는 다리 부근에 월석이 떨어지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가 난 이후로 다난들은 의식적으로라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 하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이멘 마하에 들리는 방문자들의 수도 줄어들어 최근에 방문증을 받기 위해 영주의 성에 들리는 외부인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덕분에 주로 방문객을 맞이하던 근위 기사는 월석 잔해를 제거하는 것이 더 우선적이라는 판단하에 한동안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영주의 성에서 큰 도로까지 이어지는 널따란 길에는 가로등이 세워져 있다. 영주성의 커다란 문으로 향하는 이멘 마하의 대로는 마을을 세로로 관통하는 중앙 대로와 이어져 있어, 길을 잃은 이들의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다. 정원수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된 가로등은 낮임에도 불구하고 환히 켜져 있어 낯선 방문객의 얼굴을 주시하듯 밝히고 있었다. 방문증을 받기 위해 영주의 성에 도착한 밀레시안은 아이던이 부재중이라는 사실에 의외라는 표정을 하고선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잠시 후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근위 대장에게 주변의 소식을 들으면 대략적인 피해 상황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밀레시안의 단순한 계획은 그의 부재로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밀레시안은 결국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멘 마하에 떨어진 월석들 중 가장 심각한 크기의 월석들만 대충 서너 개로 추릴 목적으로 도시를 떠도는 소문을 듣기 위해 광장으로 향했다.

성당의 입구에 박힌 커다란 월석만 제외하면 광장은 이전에 석상을 부수기 위해 찾았던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거리를 돌아다니는 다난들이 확연하게 줄었다는 점과, 때문에 쌍둥이 자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후가 되도록 크게 줄어들지 않는 꽃다발을 매만지고 있는 모습이 밀레시안의 신경을 잡아끌었다. 마침 장미가 피는 계절이 다가온 탓인지 이들의 바구니에는 색색깔의 장미는 허리가 꺾이고 가시마저 거세된 채 비릿한 풀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가시를 빼앗겨 천천히 시들어가는 와중에도 장미의 시취는 초여름을 박제한 듯 아뜩한 향기를 풍겼다. 화려한 향기의 입자들은 광장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흰 장미를 한 아름 안고 꽃다발을 만들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라흐 왕성의 궁정 정원사들의 손을 거친 꽃들보다는 조악했지만 동그란 봉오리나 푸릇한 이파리가 쌍둥이들이 꽃에 꽤나 애정을 가지고 돌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코로 꿰어드는 짙은 장미향에 밀레시안은 충동적으로 바구니에 꽂힌 장미꽃을 집었다. 채 다듬지 않은 꽃을 집어 든 탓에 여

린 살갗이 긁혀 가시 자국이 남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꽃을 다듬던 델과 델렌이 서둘러 다가와 꽃을 받아들곤 그녀의 손에 박힌 가시를 뽑아냈다. 상처는 약간의 따끔함만 남기곤 금세 지혈되었다. 밀레시안은 조심하셔야죠, 하고 나무라는 쌍둥이를 뒤로하고, 델과 델렌의 꽃바구니에 든 꽃송이들을 바라보다가 두 송이 어치의 골드를 지불하고 열 송이의 장미꽃을 건네받았다.

밀레시안의 양손에는 아직 개화하지는 않았으나 봉오리부터 탐스러운 흰색 장미가 가득했다. 걸음걸음마다 서정적인 꽃향기가 대기 속으로 퍼졌다. 밀레시안은 이멘 마하의 거리를 걸으며 눈으로는 골목 곳곳에 박힌 월석 잔해를 파악하면서도 틈틈이 꽃다발에 얼굴을 묻고 꽃향기를 들이마시며 불안함을 잠재웠다. 어린 꽃잎이 벨벳처럼 매끄럽고 부드럽게 스쳤다. 막 봉오리에서 피어나기 시작하는 장미 향기는 물기 어린 호수의 바람과 섞여 가시처럼 폐부 깊숙한 곳을 찔렀다.

베안 루아의 뒷골목, 그러니까 신성 기사단이 비밀스레 회동하는 으슥한 곳에 떨어진 월석을 확인하곤 막 좁은 골목을 벗어날 쯔음이었다. 술집이 위치한 상업 지구는 유독 인적이 드문데다가 빛이래봤자 베안 루아의 화려한 무드등과 조금 떨어진 힐러집 근처에 있는 등불이 전부 인터라 팔라라가 저물기 시작하는 골목은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술집 근처에 박힌 월석의 잔해가 은은한 푸른빛으로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베안 루아의 옆 골목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골목의 입구에 서 있는 이가 보였다. 혹여 길을 막고 있는 이가 취객일까 싶어 소리 없이 발을 내디딜 무렵이었다. 회백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굳게 닫힌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나 밀레시안을 바라보는 눈빛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폭포처럼 쏟아져내려 한쪽 눈을 가린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밀레시안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평범한 다난들처럼 햇살에 따라 짙은 갈색이나 남색을 띨 법도 할 만했지만, 그의 결 좋은 머리는 언제나 밤하늘처럼 고요하고 무거운 묵빛을 띠고 있어서일까. 그것과 대비되는 그의 얼굴은 월석 잔해가 내뿜는 요요한 빛을 받아 유독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붓으로 그린 듯한 눈썹은 일자에 가까운 선을 띠고 있었고, 눈두덩이 깊이 파인 탓에 눈꼬리는 살짝 처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높고 선이 굵은 콧대와 어우러져 남성적인 이목구비를 자아내고 있었다. 회색에 가까운 유백색의 눈동자 안에는 검은 동공이 뱀처럼 가늘게 자리하고 있어, 여타 다난들의 홍채처럼 화려한 색채였다면 쉽사리 느끼지 못할 이질감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사안蛇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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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하게 다문 입술이나 목 끝까지 끈을 여민 셔츠 따위만 본다면 그의 모습은 금욕적인 신자나 사제처럼 보기에 충분했겠지만, 온몸을 감싸 안은 갑주나 그의 등에 매인 타오르는 대검은 그가 강력한 검사임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그를 설명하는 것은 비단 검뿐만이 아니다. 바람이 그의 뺨을 쓸고갈 때마다 오른쪽 눈을 가린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내비치는 시붉은 색의 사안邪眼은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말 그대로 순수한 용암의 색을 닮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검은 화산재를 흩뿌리며 솟아나는 용암처럼 비틀린 욕망을 담고 일렁거리고 있었다. 고작 한 겹의 눈꺼풀이 가리기에는 그의 안에 든 격정과 정염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인지, 밀레시안은 그와 맞닥뜨리는 순간순간이 때로는 버겁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사실이 장미 가시보다 더 날카롭게 자신을 찔러대곤 했다.

발로르 베임네크, 생득적으로 지배자의 본성을 타고난 남자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분위기로 밀레시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베임네크에게서 냄새를 맡았다. 도륙의 냄새. 다 타버린 화마가 화상처럼 남기고 가버린, 지울래야 결코 지울 수 없는 잔인한 그을음의 냄새를. 실로 야만적인 포식자의 것과 같았다. 밀레시안은 꽃다발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부스럭거리며 으스러지는 몇몇 꽃잎들 사이로 아스라한 장미 향이 풍겼다.

"특별히 그대를 보러 온 건 아니지만. 하하… 이렇게 마주친 것도 나쁘진 않군."

밀레시안과 그녀의 품 안에 담긴 흰 장미꽃에 번갈아 시선을 보낸 베임네크가 뜬금없이 말을 던지며 밀레시안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밀레시안의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뺨을 훑고 지나가는 건틀릿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그의 손을 내치려 했으나 팔을 함부로 움직였다간 품에 안은 꽃다발이 망가질 것만 같아서 이도 저도 못한 채, 뿌리내린 장미꽃처럼 그의 손길을 감내해야 했다.

"여태 그대의 손에는 검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꽃다발도 꽤나 잘 어울려, 그대."

입바른 말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던 그에게서 칭찬이 나오자 기분이 묘했다. 그의 태도는 일전 토리 협곡에서 그와 그의 부관, 그리고 세라라 불린 노장과 마주쳤을 때와 비교해서 하등 다를 것이 없었으나, 그의 말투 어딘가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말속에 내포된 속뜻은 마치 그녀가 당장이라도 자신의 심장에 칼을 박아주기를 바란다는 것처럼 들렸다. 밀레시안은 그의 원대로 당장 칼을 박아주는 것 대신, 서둘러 봉오리를 터트린 장미 몇 송이를 골라 그의 품 안에 안겨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꽃을 건네주었지만 밀레시안의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얼떨결에 장미꽃을 건네받은 베임네크는 양 미간을 모으는 것으로 의심인지 실망인지 모를 감정을 표출했다. 그는 쉽사리 꺾이는 꽃 따위나 연약한 생물에서는 어떠한 매력이나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베임네크에게 있어 유일한 도락은 전투와 살육과 같은 물리적이고 실체적인 행위가 있을 뿐이었기에, 감히 서너 송이의 꽃이 그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가 밀레시안이 건네준 장미꽃에 시선을 준 이유는, 자신의 손에서 곧 시들어버릴 꽃들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을 때에는 금방이라도 피어날 듯 꽃봉오리를 부풀리고 있기 때문이었고, 또한 곧 개화할 꽃과 같이 밀레시안이 가진 무한한 생동성이 그의 기이한 욕망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손 닿는 순간, 그 짧은 미구에 베임네크는 기묘한 감정을 경험했다. 그녀라면 어쩌면 갈기갈기 찢긴 자신의 삶을 봉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그것은 그의 기억 속에 잊힌 미련을 불러왔다. 살아있는 자들의 가장 깊은 곳에 타오르는 근원, 삶에 대한 초탈보다는 살아가고 싶다는, 세월에 풍화되어 사라져버린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대는 가끔씩 내가 이해할 수 없을 행동을 하는군. 이렇게 쉽게 시들어버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

그는 말을 멈춘 채 손에 들린 꽃을 힐끗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이 밀레시안에게 향한다면 그것은 애정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베임네크는 그 질문에 단연코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욕구마저 거른다면 그 자신에게 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그는 밀레시안이 필요했으나, 그 이유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에게서 구원을 바라는 것뿐이다. 베임네크는 건네받은 꽃을 밀레시안에게 돌려주는 대신, 섣부르게 핀 꽃 한 송이를 손쉽게 꺾어냈다. 장미를 밀레시안의 귀에 꽂아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금세 바스러지는 것은… 그대가 지킬 것들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그의 혼잣말과 같은 물음에 밀레시안이 흠칫하며 반 보 뒤로 물러났다. 그가 꽂아준 꽃송이는 귓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가 이내 부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져, 밀레시안의 뒷걸음질에 연약하게 짓이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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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임네크는 짓이겨진 꽃송이에서 향긋한 비명 소리를 맡았다. 그것은 오직 밀레시안에게서 찾을 수 있는, 그간 어떠한 적에게서도 발견하지 못한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장황하고 지루한 권태의 삶에서 발견한 즐거움이었다. 때문에 베임네크는 밀레시안이 화려하게 만개할 때까지 좀 더 기다려 주기로 결심했다. 과거의 그가 지켜야만 했던 것들이 이제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듯이, 어떠한 부덕에도 굴하지 않던 밀레시안이 종국에는 애정의 응달에 가려진 절망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증오의 대상으로 탈바꿈할 때까지.

"구세의 영웅에게 할 말은 아니다만… 나는 그대가 마치 그 꽃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
"……."
"아름답고, 여리고, 향기로워. 하지만… 내가 그대를 꺾어 취하더라도 그대는 결코 시들지 않겠지."

그는 밀레시안을 향해 한순간도 진득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방금 제가 뱉은 말과는 다르게, 베임네크는 오랜 시간을 걸쳐 드디어 찾아낸 밀레시안이라는 선물을 함부로 거꾸러트리거나 저버릴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수백 년간 살아오면서 그와 비슷한 처지, 혹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처지의 존재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최초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이를 발견했고, 심지어 밀레시안은 베임네크가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면서까지 빚어낸 또 다른 자신과 같았다. 그런 그녀를 베임네크가 어떻게 감히 함부로 꺾어취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오히려 밀레시안이 스스로 신념을 꺾기를 바랐다. 그렇게나 연약하고 나약한 이들에게서 실망해서 종국에 자신과 같이 새카맣게 변질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짓밟혀 시커멓게 물들어버린 흰 장미꽃처럼.

"그대의 그런 점이 나를 더 잔인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을까?"

그의 물음이 조롱처럼 느껴졌다면 과한 착각일까. 베임네크는 입꼬리를 올려 희미한 미소로 밀레시안에게 말을 던졌지만, 밀레시안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애초부터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눈치였는지 나직하게 웃으며 손안에 든 장미꽃에 코를 묻었다. 막 피어난 장미는 밀레시안의 체취와 뒤섞인 가련하고 애처로운 향기가 났다. 어찌보면 피 냄새를 연상시키는 풋내 같기도 했다.

어느 때고 밀레시안이 그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겠냐마는, 이번만큼은 그의 혼잣말에서 베임네크의 비뚤어진 소취所取를 읽어냈다. 그의 심저에 시커멓게 그을린 저것들은 그의 과거로부터 이어진 절망의 역사였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자의 욕망이 비대하게 몸집을 부풀리다가 홀로 타버려 불씨조차 남지 않은 잿더미였다. 어느 순간 화마가 되어 베임네크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던 그것은, 밀레시안을 처음 본 순간부터 다시금 심저로부터 끌어올려져 밀레시안을 연료 삼아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좀 더 그대와 나눌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지만… 아직은 우리가 만날 때가 아니야."
"……."
"허나 받은 만큼 되돌려 주는 것이 예의겠지."
"뭐?"

그는 되묻는 밀레시안을 향해 은밀한 모략을 알려주듯 나직하게 속삭이며 흐릿한 검은 안갯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밀레시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의 모습에 자신이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으나, 발아래에 놓인 짓이겨진 장미꽃이 베임네크와의 대담이 꿈이 아니었음을 방증하고 있었다. 그녀는 발치의 꽃을 조심스럽게 주워들면서 베임네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곱씹었다.

'그대를 위해서 피처럼 검은 장미를 준비해 두도록 하지. 기대해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