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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이불 속. 공기속에 감도는 진한 꽃 향기. 이따금씩 들려오는 어린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 밀레시안은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고 몸을 뒤척였다. 여긴 어딜까? 던바튼이나 티르코네일인가? 밀레시안은 잠에 취한 기분으로 웃으며 베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던전에 다녀왔더니 조금 피곤한걸. 혼자서 몽환의 라비 던전을 돌아서 그런가. 조금만 더 자야지..

 

밀레시안은 포근한 베개를 하나 품에 안은 채 이불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눈을 꼭 감고 잠에 취해가는 몸. 지독한 피로에 젖은 몸이라 침대 바로 옆에 서있던 이의 기척 따윈 느낄 틈도 없었다. 평소라면 잔뜩 날을 세우며 경계했을 목소리가 말없이 낮게 웃는 것도. 요사스러운 보라색 불꽃이 타오르는 벽난로도. 비쳐드는 빛 하나 없이, 죽음의 기운만이 감도는 던전의 깊은 방안에 누워있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별은 다시 잠들었다.

 

"이렇게 쉬울 줄 알았다면, 진작에 이곳을 움직이는 거였는데 말이지."

 

무슨 소리지? 밀레시안의 의식이 잠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익숙한 목소리에 미간이 찌푸려지자 그것마저 귀엽다는 얼굴로 사내가 웃었다. 부드러운 장갑을 낀 손가락이, 미간에 닿아 살살 주름을 폈다.

 

"내 별은 귀엽기도 하지. 조금 더 자도 괜찮네."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다시 정신이 나른해졌다. 마법이나 현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포근한 침대의 감촉에 정신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밀레시안은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편안하게 몸을 웅크렸다.

 

"좋은 꿈 꾸게."

 

다정한 말을 어찌 흘려들을 수 있을까. 밀레시안은 미소지으며 다시 잠에 취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밀레시안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가, 누운 채 눈알만 도르륵 굴려 낯선 침실을 살펴보았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침실. 고급스러운 침구. 벽난로에 피워진 불꽃이 보랏빛이라 이질적이었다. 처음보는 곳이었건만 미묘하게 익숙했다. 검은색을 중심으로 검붉은 색과 보랏빛으로 꾸며진 내부가 묵직하면서도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알 듯 말 듯한데..."

 

들어줄 이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밀레시안은 몸을 일으킨다. 부드러운 천조각이 몸에 닿아 내려다보니 검은 슬립이 입혀져 있는 걸 보고 별은 혀를 찼다. 누군진 몰라도 악취미가 따로 없다며 적당히 기지개를 펴고 있자니 머리가 그제야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밀레시안은 주변을 둘러보곤, 작은 옷장을 포착해냈다. 아마도 이 천 쪼가리보단 적당한 옷이 있지 않을까? 작고 하얀 발이 바닥에 내려서고, 화려하게 장식된 옷장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붉은 유리로 장식된 옷장에는 실내와 닮은 검붉은 옷들이 즐비했다. 고급스런 재질로 되어있지만 하나같이 얇은 드레스를 보며 밀레시안은 잠깐 혀를 찼다. 그나마 옷이 길어보이는 것을 들고 욕실로 통하는 문을 찾는다. 몸이 이상하리만치 갸날프고 약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무언가 기묘했다.

 

환생 직후 보다도 더 나약해진 기분이다. 미묘하게 마력을 제한당하는 느낌에 무기도 펫들도 소환되지 않는걸 보니, 어지간히 까다로운 마법이 걸린 곳이 아닐까. 밀레시안은 흐릿한 기분으로 적당히 상황을 추리하며 욕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다행히 골라낸 옷은 처음 입고 있던 슬립보다 훨씬 길었고, 조금 얇은 재질이긴 했지만 안은 비쳐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욕실의 문을 열고 나와 다시 침대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침대에는 선객이 있었다. 아니, 밀레시안의 입장에서는 불청객이라 불러야 마땅할 이었다. 얼마 전까지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맞대던 상대였으니 당연했다. 이 상황의 범인으로 가장 유력한 이이기도 했으니까. 밀레시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이름을 읊조렸다.

 

"...베임네크."

"옷이 잘 어울리는군."

 

밀레시안은 작게 욕을 중얼거리며 경계어린 눈빛으로 사내를 훑었다. 평소의 무거운 무장은 어디에 두었는지, 저쪽도 가벼운 천옷 차림이었다. 물론 저 사내가 갑옷과 검이 있건 없건 위험한 사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 밀레시안은 그저 미약한 마력이나마 끌어올려 몸에 엷은 마나실드를 둘렀다.

 

"그리 경계할 것 없네. 여기에선 나도 객에 불과할 뿐이야. 이곳의 주인이 그대를 데리고 있겠노라 흔쾌히 응해주었거든."

"이곳...? 주인?"

 

색소 엷은 눈동자에 혼란이 어렸다. 화려한 저택의 방과 같던 실내가 갈수록 익숙해졌다. 베인은 짙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의 별은 아직도, 여기가 어디인지 눈치채지 못한 걸까.

 

"평소의 기민한 그대답지 않군. 여긴 그대에게도 익숙한 곳일텐데."

"...모르겠는데."

 

밀레시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마력과 전투능력이 떨어진 만큼, 기억력과 지식도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베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지만 밀레시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의 경계심마저 내팽개친채, 밀레시안은 베인과 거리를 두고 마주 앉았다. 그 반응마저 만족스러운지 싱긋 웃는 사내의 얼굴이 미묘하게 거슬리면서도 거슬리지 않는 것을 눈치챈 밀레시안이 작게 욕을 읊조렸다.

 

"내 영혼이라도 건드렸어? 아니면 이 방 자체가 문제인가."

"반만 맞췄네. 이 방이 아니라 이 던전이고, 그대의 영혼이 아니라 육신이 던전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지."

"던전이라고, 여기가?"

 

사고회로가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이런 던전이...

 

아,

몽환의 라비 던전...

 

..그래서 펫 소환도 안되던 거였나.

 

미간을 찌푸리는 반응에 손이 뻗어온다.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자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부드럽게 미간을 문지른다.

 

"미간 찌푸리지 말게. 주름 생길라."

"...손 떼."

 

작은 한숨을 내쉬는 밀레시안의 목소리에 체념이 섞였다. 펫도 능력도 제한당한 상태에서 이 남자와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저 거리를 두고 침대에 걸터앉자 남자의 표정에 실망이 깃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밀레시안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날 여기로 데려온 이유는?"

"말하지 않았나, 이곳의 주인에게 그대를 맡겨볼 요량이라고."

"그건 또 무슨 미친 발상이야..."

 

치솟는 짜증에 이번에는 스스로 미간을 꾹꾹 누르는 모습이, 마왕의 눈에 그토록 깜찍할 수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이를 갈며 침대 한쪽으로 몸을 잔뜩 붙였다.

 

그러다, 허리춤의 이상한 감각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무슨...!?"

"이제야 눈치챘나?"

 

등쪽이 파인 옷이라 영 느끼질 못했더니, 허리에 돋아난 작은 피막 날개가 이제야 보였다. 밀레시안은 기겁하며 자신의 머리카락 색을 닮은 날개를 만지작거린다. 평소에 끼고 다니던 날개와는 달리 촉감이 생생하고, 확연히 와닿는 감각에, 아직 여리다는 듯 파르르 떠는 것이....

 

"서큐버스들의 날개....?"

"정답일세."

 

뭐야, 이게! 밀레시안은 기겁하며 허리춤의 날개를 잡아당겨 보았지만, 이미 몸의 일부가 된 날개가 쉬이 떨어질 리가 있나. 선명한 통각에 그저 눈물을 글썽이며 허리춤의 날개를 놓을 뿐이었다.

 

"라비 던전의 서큐버스들이 들으면 서운해 하겠군. 그들의 날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나?"

"난 서큐버스가 아냐!"

"지금은 그대도 서큐버스일세. 이 라비 던전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고하게 핀 검은 장미지."

 

밀레시안은 선명한 적의를 드러내며 베인을 쏘아보았다. 이 남자가 싸움에 미치고, 죽여달라는 등 온갖 소리를 하는 걸 다 들어주었지만 이런 행동은 선을 넘어섰다. 밀레시안은 이를 갈며 손에 잡히는 베개를 집어던졌다.

 

아무리 흐릿해진 정신과 약해진 몸이라도 밀레시안은 밀레시안이라는 걸까. 날아간 베개는 정확하게 베인의 안면을 맞추었고, 베인은 얼굴을 살짝 쓸어보더니 쓰게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매정하군. 기왕 서큐버스가 된 것, 다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헛소리 말고 꺼져!"

 

밀레시안의 눈동자에 부끄러움이 어리자 베인은 슬몃 웃었다. 허리춤의 날개가 움찔거리는 것이 자못 귀여웠지만 더 날아올 말이 걱정되어 일단 자리를 비켜줄 요량으로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버린다. 밀레시안은 방문이 닫히고서야 씩씩거리던 숨을 가라앉히곤 허리춤을 다시 매만진다.

 

움찔

움찔

 

움찔거리는 날개가 잠깐 귀엽게 느껴졌다. 아니지, 포워르가 되어가는게 어떻게 귀여울수가 있어! 밀레시안은 정신을 차리러 욕실에 들어가 차가운 물을 틀었다. 얼굴에 몇번이고 찬물을 거칠게 끼얹고 나서야 흐릿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정신을 조금 차리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오니, 다시 방안에는 불청객이 있었다. 이번에는 베임네크가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몇 번 안면이 있던 존재였다.

 

"서큐버스 퀸..."

"발로르 님께서 보내서 왔어요. 몸은 좀 적응이 되시나요?"

"적응이 될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밀레시안이 포워르가 된다는 건 듣도보도 못했다구요."

"육체가 포워르로 변하는 것이니 영혼이 영향을 받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크리스텔, 그 아이의 예를 보면 아시잖아요?"

 

서큐버스 퀸은 온화하게 웃으며 밀레시안의 옆에 자리잡고 앉았다. 끝부분이 조금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져주며 웃는 얼굴이 마치 온화하고 자상한 어머니 같아, 밀레시안은 차마 그녀에게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후후 하며 작게 웃는, 아름다운 얼굴에 이길 수 있는 이가 몇명이나 될까.

 

"생각지도 못한 딸이 생긴 기분이네요. 어차피 육체만 포워르로 변하는 거니까, 당분간은 여기서 서큐버스로 살아보는 건 어떠신가요?"

"...인간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거에요?"

"어머, 물론이죠. 포워르도 다난은 입고있는 육체에 좌우되지만, 당신은 밀레시안이잖아요? 새로운 육체를 입을 수 있는 당신에게 잠시나마 서큐버스의 모습을 덧씌웠다고 해서 당신이 밀레시안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 아니랍니다."

 

발로르님이 말씀 안하시던가요? 갸웃거리며 되묻는 얼굴에 밀레시안은 이를 갈았다. 발로르 베임네크가 어지간히 나를 놀리고 싶었나 보네요. 짓씹듯 내뱉는 말에 서큐버스 퀸은 살며시 웃었다.

 

"그분이 이리 누군가에게 짓궂게 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네요. 뭐, 서큐버스들을 앞에다 두고 본인의 것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실 때 알아보았어야 했는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밀레시안은 뺨을 붉히면서도 서큐버스 퀸의 시선을 피했다. 몽마들의 여왕은 간만에 즐거운 것을 본 소녀마냥 까르르 웃으며 밀레시안의 한쪽 뺨에 입맞추었다.

 

"발로르님은 알려주지 말라고 하셨지만... 어차피 밀레시안은 환생을 통해 새로운 육체를 얻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새로운 육체를 얻으면 다시 인간이 될 테니, 그때까지만이라도 검은 장미로 살아주면 안될까요? 발로르께서 당신을 서큐버스로 만들어보겠다고 나름 고생하셨답니다?"

"그 정성으로 차라리 죽으라고 전해주세요..."

 

힘없이 침대위로 늘어지는 밀레시안의 말에 여왕은 그저 소리 높여 웃었다. 밀레시안은 잠깐 눈을 감고 다음 환생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했다. 지금이 삼하인이니까, 기껏해야 몇 주 정돈가?

 

"임볼릭 때까지는 참아줄테니까..."

"어머?"

"대신에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던바튼도 어디도 건드리지 말라고 해요..."

 

여왕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물론이죠."

 

 

어린 서큐버스들이 총을 들지 않으면 귀엽다. 밀레시안은 며칠째 쉬지도 않고 놀아달라며 까르르 웃는 베이비 서큐버스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서 쟤가 꽈당 하고 넘어진거야! 팬텀 앞에서!"

"너어- 밀레시안 언니한테 그런거 말하지 말래도!"

 

재잘재잘, 조잘조잘. 귀엽기도 하지. 밀레시안은 어린 서큐버스 하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나름 평화로운 일상이라고 생각한 것도 찰나, 붉은 던전을 더 짙은 칠흑으로 덮으며 나타난 사내가 있었다. 베인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마기에 베이비 서큐버스들이 덜덜 떨면서 밀레시안의 다리를 꼭 붙들었다. 어린 다난들이 보호자에게 달라붙어 두려운 것을 피하는 모습과 닮아 있어, 포워르도 사실은 다난과 별반 다를 게 없는거 아닐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어찌되었건, 밀레시안은 베이비 서큐버스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너희들의 어머니에게 가라고 작게 속삭였다.

 

"서큐버스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토록 싫어하더니. 의외로 적응을 잘 하고 있군."

"포워르의 육신을 입고 던바튼에 달려가는 거라도 보고 싶었던거야? 함부로 돌아다닐 수 있을리가 없잖아."

 

밀레시안의 표정은 굳어있었지만, 그가 기대한 것보다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호오? 베임네크는 외려 이 반응에 더 흥미를 느끼며 밀레시안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포워르로 만들었다고 나를 죽이려 들기라도 할줄 알았는데."

"죽고 싶다면 죽여 줄게. 포워르가 된 건... 영구적인 것도 아니라길래 그냥 봐주기로 했어."

"흠... 눈치챘나? 아쉽군."

 

다시한번 베개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슬쩍 웃는 모습이 꽤나 얄미웠다. 밀레시안은 당장 나가버리라며 서큐버스들에게 빌린 듀얼건을 겨누었다. 베인은 그저 느긋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총구를 밀어내고 밀레시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치 사랑스럽다는듯.

 

"이 검은 장미의 모습으로 남아주길 바랬는데 말이지."

"...헛소리 집어치워."

"나름대론 진심일세."

 

밀레시안은 귓가를 붉히며 시선을 피한다. 베인은 귀엽다는 듯 웃으며 이마에 살며시 입맞추었다. 밀레시안이 물러서려는 순간 한 팔이 허리에 감기며 단단한 품으로 끌어당긴다. 이해할 수 없을만큼 다정한 포옹에 밀레시안이 굳는 것도 잠시, 한쪽 귀에 따끔한 고통이 지나갔다.

 

"아파!"

"잠깐만 참게."

"뭐하는 거야..."

"작은 선물이니, 잠시만.."

 

밀레시안이 가느다란 팔로 밀어내도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조심스레 귓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사뭇 낯설었지만, 밀레시안은 일단 아픔에만 집중하며 상대를 밀어내기 바빴다. 베인은 몇 번이고 귓볼을 어루만져주다가, 아쉬운 얼굴로 못이기는 척 밀려나주었다. 손이 떨어지자 그제야 귓가에도 느껴지는 이물감에 밀레시안은 손을 들어 귀를 만지작거렸다. 귀에 딱 달라붙는 형태의 작은 귀걸이. 귀걸이를 하고 다닌 적이 없는 것은 아니였으나, 한쪽만 하려니 기분이 묘했다. 게다가 이 사내가 멋대로 끼워버린 귀걸이라면야 더더욱.

 

밀레시안은 불만어린 표정으로 가까운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검은 보석을 가공해 만든 장미모양의 귀걸이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선물일세."

"...하필이면 검은 장미라니.."

 

센스 별로네. 밀레시안은 심술을 부리며 고개를 돌린다. 베인은 그저 소리없이 웃으며 뒤돌아선 밀레시안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등에 돋아난 날개를 슬쩍 건들여볼까 하다가 일전에 잔뜩 싫어했던 것을 떠올리곤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허리를 잡아 몸을 돌렸다. 놀란 기색의 눈동자가 마음에 들어 짙게 웃자, 별의 뺨이 붉게 물든다. 그것을 놓치지 않으며 베인은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작은 입술을 제 것으로 덮었다.

 

방금전보다 더 놀란 기색이었다. 처음 서큐버스의 몸이 되었을 때보다 더 자란 날개가 귀엽게 날갯짓한다. 팔로 허리를 고쳐 안고 혀로 천천히 입술을 훑자 머뭇거리면서도 입술을 열어 제 혀와 얽게 두는 것이 자못 귀여웠다. 자신이 마왕이었던 시절 그녀가 서큐버스였다면, 지위를 남용해서라도 당장 품에 두지 않았을까.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달콤하게 풍겨오는 향기에 베인은 정신없이 혀를 얽었다.

 

멈추고 싶지 않을 만큼 달콤한 키스였다. 그토록 원하던 이와의 키스이기 때문인지. 그녀가 검은 장미가 되어 더 매혹적이 되어버린 탓인지. 혹은 이것이 이곳의 이름마냥 한낱 꿈에 불과할 일이기 때문인지.

 

밀레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열정적으로 끌어당겼다. 까치발을 살짝 들고서 갈급한 키스에 응하는 반응에 사내의 심장이 뛰었다. 여지껏 다른 행동에 대해 보였던 반응과 달리 자신을 밀어내지 않고있다는 사실에 벅차할 틈도 없이 베인은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좀더 깊은 입맞춤을 갈구했다. 밀레시안도 그를 여전히 밀어내지 않으며 그 순간의 열기에 취해 달콤한 키스를 나눌 뿐이었다.

 

키스를 나눈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치 꿈결같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떼내자 베인이 살짝 미소지었다. 밀레시안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푸슬 웃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꿈으로 둘 셈이겠지?"

"물론. 지금은 몽마니까."

 

밀레시안은 키득거리며,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베인의 뺨을 쿡 찔렀다. 라비 던전에서 생활하더니, 서큐버스 다 되었군. 장난스레 혀를 차는 반응에 밀레시안은 픽 웃고는 귀에 매달린 장미 귀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서큐버스로 만든 게 당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줬으면 해."

"이대로 서큐버스로 살라고 해도 되겠군."

"검은 장미는 되지 않는대도."

 

별은 가볍게 웃으며 뒤돌아 섰다. 베인은 잠깐 손을 뻗었지만, 그대로 붙잡았다간 미움 받을 것이란 생각에 금방 손을 내렸다.

 

"내일이면 삼하인도 끝난다."

"내일이 벌써 임볼릭인가. 약속은 지켜줘."

"...물론이지."

 

밀레시안은 작게 웃었다. 베인의 표정에 잠깐 불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곤 까르르 웃었다가, 이마에 쪽 입맞춘다. 마왕의 표정이 순식간에 멍해졌다. 밀레시안이 해맑게 웃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마왕의 얼굴도, 이내 금방 풀어졌다. 던전에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정말이지 가차없이 나가겠다고 하는군."

 

던전 로비로 통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보내주기 싫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밀레시안은 어느새 돋아난 꼬리를 장난스레 살랑이며 웃었다.

 

"약속 했잖아. 삼하인이 끝나면 여기서 내보내준다고."

"서큐버스로서의 삶을 나름 즐기는 것 같던데."

"쉿. 거기서 뻣뻣하게 구는거보단 낫잖아?"

 

장난스레 웃으며 햇빛이 비쳐드는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 아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미움받을 자신만 있다면 그대로 돌려세워서 영원히 환생따위 하지 말라고. 이곳의 서큐버스로 살라고 할 텐데. 베인은 쓰게 웃으며 밀레시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매정하기도 하지, 나의 검은 장미는."

"그것도 오늘까지야."

 

던전을 나서자 소울스트림과의 연결이 다시 강하게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푸슬 웃으며 머릿속으로 나오를 불렀다. 베인의 아쉬운 얼굴을 뒤로 하고 영혼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자, 익숙한 새하얀 공간에 내려선다. 황급히 내려오는 나오를 보며 밀레시안은 활짝 웃었다. 나오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무색하게 울상이었다.

 

걱정했다며, 조금만 더 늦었다면 한동안 포워르로 지내셔야 할 뻔 했다며 우는 나오를 겨우겨우 달래고 다시 완벽한 인간의 몸으로 환생해 던바튼에 내려앉자 친한 밀레시안들이 몰려들었다. 어디있었냐, 걱정했다 하는 말이 들려오자 별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치우자, 귓가에서 까만 장미 수정 귀걸이가 반짝였다. 못 보던 액세서리에 물어오는 이가 있었지만, 밀레시안은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릴 뿐이었다.

 

아주 작은, 기념품이라며.

The end.

검은 장미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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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실프하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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